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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π)와 함께 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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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π)와 함께 춤을...

2015.11.23 18:00

뉴턴 씨는 말했다. 자기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서 있기 때문에 그렇게 멀리까지 볼 수 있노라고. 내 어깨도 그의 영광을 떠받치는 튼튼한 어깨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면 지나친 자화자찬이 될까.
- ‘핑거포스트, 1663’에서 존 월리스의 말

 

 

영국 작가 이언 피어스의 1997년 작 ‘핑거포스트, 1663’은 ‘더 타임즈’로부터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버금가는 역사 미스터리”라는 극찬을 받은 장편소설로 배경은 17세기 영국이다. 당시 영국은 엘리자베스여왕의 전성기가 끝나고 제임스1세와 찰스1세의 폭정이 이어지는 상황에서 영국국교와 가톨릭, 개신교 등이 얽히고설킨 종교 갈등이 겹치면서 결국 내란이 시작된다.

 

올리버 크롬웰이 이끄는 의회군은 1645년 네이즈비 전투에서 왕당군을 패퇴시키며 우세를 잡았고 1949년 찰스1세가 처형되면서 영국은 공화국이 된다. 그러나 1658년 호국경 크롬웰이 사망하면서 다시 혼란에 빠진다. 결국 1660년 프랑스에 망명해있던 후계자 찰스2세가 돌아오면서 영국 역사상 유일한 공화정 시대가 막을 내리고 왕정복귀가 이뤄졌다. 그러나 정국은 여전히 불안했다.

 

이야기는 왕정복귀 직후 옥스퍼드대 뉴칼리지의 로버트 그로브 교수의 죽음을 둘러싸고 벌어진다. 실존인물인 그로브는 1663년 3월 30일 사망했는데, 소설에서는 비소를 탄 술을 먹고 죽은 걸로 나온다. 소설은 네 사람의 증언의 형식인 4부로 이뤄져 있다. 이 가운데 3부 ‘극장의 우상’에서 사건의 전후 상황을 증언하는 사람이 당시 옥스퍼드대 기하학 교수인 존 월리스(John Wallis)다.

 

소설에서 월리스는 당대 최고의 수학자이면서 암호해독가로 나오는데 처세술도 보통이 아니다. 실제로 월리스는 왕정과 공화정, 다시 왕정을 거치는 극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권력의 주변을 맴돌며 출세가도를 달렸다. 소설에서 월리스는 비밀문서의 암호를 해독하기 위해 조사를 벌이다 베네치아인 마르코 다 콜라(가상의 인물)가 암살(국왕 또는 대법관)의 밀명을 띠고 영국으로 잠입했다고 판단하고 집요하게 사건을 파헤친다.

 

월리스는 콜라가 위협을 느껴 자신을 독살하려고 했는데 엉뚱하게 그로브가 죽게 됐다고 믿고 있다. 한편 월리스는 그로브의 하녀였던 사라 블런디라는 처녀를 급진파 잔당의 연락책이라고 생각했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 월리스는 콜라가 아닌 블런디를 범인으로 몰게 되고 결국 블런디는 사형을 당한다. 그럼에도 월리스는 대의, 즉 국가의 안녕을 위한 불가피한 희생이었다며 변명한다. 한마디로 소설에서 월리스는 편견과 냉혹함이 몸에 배어있는 위선자로 나온다.

 

● 무한대 기호 처음 써

 

뉴턴이 등장하기 전까지 17세기 영국 최고의 수학자였던 존 월리스. 무한대 기호와 파이를 무한곱으로 표현하는 수식을 만든 수학자로 수학사에 남았다. - 위키피디아 제공
뉴턴이 등장하기 전까지 17세기 영국 최고의 수학자였던 존 월리스. 무한대 기호와 파이를 무한곱으로 표현하는 수식을 만든 수학자로 수학사에 남았다. - 위키피디아 제공

작가가 무얼 근거로 당대 최고 수학자를 이렇게 비열한 인간으로 그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존 월리스는 지금도 장수인 87세에 사망할 때까지 정말 다사다난한 삶을 살았던 것 같다. 1616년 잉글랜드 켄트에서 태어난 월리스는 1631년 처음 수학을 접했고 곧 흥미를 느꼈다. 그는 수학뿐 아니라 의학과 신학도 공부했고 훗날 왕실사제가 되기도 했다. 공화정 시절에는 암호해독가로 활약하면서 왕당파 잔당들의 서신을 해독하기도 했다. 훗날 독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코트프리트 라이프니츠가 하노버공국에 와서 암호학을 강의해달라고 했지만 거절했다고 한다.

 

1649년부터 옥스퍼드대에서 기하학 교수로 봉직하면서 월리스는 수학에서도 뛰어난 업적을 거뒀고 중요한 책도 몇 권 펴냈다. 이 가운데 특히 두 가지 업적이 수학사에서 언급되고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무한대 기호(∞)다. 즉 1655년 펴낸 ‘원뿔곡선에 대한 논문’에서 월리스는 “나는 평면이 무한한 숫자의 평행선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또는 무한한 숫자의 평행사변형이라고도 볼 수 있는데, 폭이 무한히 작아 전체 폭의 1/∞이다. 이때 기호 ∞는 무한대를 뜻한다”라고 쓰고 있다.

 

같은 해 펴낸 책 ‘무한의 산술론(Arithmetica Infinitorum)’은 월리스의 가장 큰 업적으로 여겨지는데, 훗날 뉴턴이 미적분학을 고안할 때도 이 책을 읽은 게 큰 도움이 됐다고 한다. 맨 앞의 인용문은 소설에서 월리스가 한 말이지만 실제로도 그렇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담이지만 월리스는 영국왕립학회를 만드는데도 큰 역할을 했고 자신보다 26세 연하인 뉴턴의 천재성을 인정해 여러모로 그를 돕게 된다. 미적분의 우선권을 둘러싼 뉴턴과 라이프니츠의 신경전을 지켜본 월리스는 똑같은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먼저 출판하는 게 중요하다며 뉴턴이 ‘광학’(1704년)을 집필하게 독려하기도 했다.

 

‘무한의 산술론’에는 흥미로운 수식이 하나 나오는데 바로 파이(π)를 무한곱으로 나타낸 ‘월리스 곱(Wallis product)’이다. 무한곱은 수열의 항을 모두 곱하는 형식이다. 우리가 익숙한 무한급수는 수열의 항을 모두 더하는 형식이다. 무한급수가 어떤 값에 수렴하려면 n이 클 때 항의 값이 0에 수렴해야 하듯이, 무한곱이 어떤 값에 수렴하려면 n이 클 때 항의 값이 1에 수렴해야 한다.

 

파이를 나타내는 월리스 곱. 앞의 기호(대문자 파이)는 무한곱을 나타낸다.  - 위키피디아 제공
파이를 나타내는 월리스 곱. 앞의 기호(대문자 파이)는 무한곱을 나타낸다.  - 위키피디아 제공

 

● 파이를 나타내는 수식들

 

파이, 즉 원주율은 초등학생도 알고 있지만 생각할수록 신비로운 수다. 인류는 수천 년 전부터 원의 지름과 원둘레 길이의 관계를 정확히 알고 싶어 했지만 뜻밖에도 이게 잘 안 됐다. 3과 1/8보다는 크고 3과 1/7보다는 작은 수라는 건 곧 파악했지만, 아무리 분수를 교묘하게 만들어도 정확한 원주율이 나올 수 없다는 걸 알고 절망했다. 훗날 파이는 정수의 비율, 즉 유리수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리수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즉 하나의 숫자로 표시할 경우 소수점 이하 자리가 무한할 뿐 아니라 어떤 숫자가 올지 예측할 수가 없다. 지금도 가끔 ‘파이의 값을 소수점 몇째 자리까지 구했다’는 식의 뉴스가 나오는 이유다.

 

15세기 인도 수학자 마드하바는 비록 파이의 값을 정수의 비율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유리수의 무한 합으로 나타낼 수 있음을 처음으로 보였다. 1671년 스코틀란드의 수학자 제임스 그레고리와 1674년 라이프니츠가 독립적으로 같은 식을 재발견했다. 이들이 발견한 견 아크탄젠트(탄젠트의 역함수)를 무한급수로 표현하는 식인데, arctan(z)에서 z=1일 때 무한급수가 π/4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아크사인과 아크탄젠트는 무한급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x=1일 경우 위의 식은 π/2의 무한급수가 되고(뉴턴이 발견), 아래 식은 π/4의 무한급수가 된다(그레고리와 라이프니츠가 발견). - 위키피디아 제공
아크사인과 아크탄젠트는 무한급수 형식으로 나타낼 수 있다. x=1일 경우 위의 식은 π/2의 무한급수가 되고(뉴턴이 발견), 아래 식은 π/4의 무한급수가 된다(그레고리와 라이프니츠가 발견). - 위키피디아 제공

한편 뉴턴도 파이를 표현하는 무한급수를 발견했는데 아크사인 급수로 꽤 복잡하다. 뉴턴은 1665년에서 1666년에 걸쳐 이 급수를 이용해 소수점 아래 열다섯 자리까지 파이값을 구했는데 훗날 “이 계산을 하느라 얼마나 많은 숫자를 썼는지 차마 말하지 못하겠다. 그 사이 다른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고 썼다.

 

흥미롭게도 파이는 무한곱의 형식으로도 나타날 수 있는데, 먼저 프랑스 수학자 프랑수아 비에트가 1593년 발견한 수식이다. 또 하나의 수식이 바로 월리스가 발견한 무한곱이다. 필자는 위키피디아의 월리스곱 항목과 수학책 몇 권을 봤음에도 월리스가 어떻게 이 수식을 얻게 됐는지 모르겠다. 기발한 귀납법을 썼다고만 기술돼 있는데 아무튼 월리스가 수학천재인 것만은 확실한 것 같다. 월리스는 초인적인 계산능력을 지니고 있었는데, 53자리 숫자의 제곱근인 27자리 숫자를 머릿속에서 계산으로 구했다는 일화도 있다. 

 

● 수소원자 에너지 구하는 식 만들다 나와

 

학술지 ‘수리물리학저널’ 11월 17일자에는 수소원자의 에너지를 구하는 양자역학 방정식을 푸는 과정에서 360년 전 발표된 월리스곱을 표현한 수식이 나왔다는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실렸다. 많은 수학자를 애타게 한 수 파이가 원자의 에너지를 기술하는 물리학 수식에 들어있다는 말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원의 곡선 같은 고전적 기하학이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더 뜻밖의 결과다.

 

‘수리물리학저널’에 실린 수식으로 궤도각운동량양자수 l이 무한대일 때 월리스 수식으로 전환됨을 보여주고 있다. - 수리물리학저널 제공
‘수리물리학저널’에 실린 수식으로 궤도각운동량양자수 l이 무한대일 때 월리스 수식으로 전환됨을 보여주고 있다. - 수리물리학저널 제공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이 논문의 두 저자 가운데 한 사람이 51년 전인 1964년 힉스메커니즘을 제안한 논문을 발표한 미국 로체스터대의 이론물리학자 칼 헤이건이라는 것이다. 1964년 학술지 ‘피지컬리뷰레터스’에는 불과 몇 달 사이 힉스메커니즘을 제안한 논문 세 편이 잇달아 발표됐다. 헤이건과 제럴드 구럴닉, 톰 키블의 논문은 세 번째였고 그래서인지 이들은 2013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지 못했다. 수상자는 첫 번째 논문의 저자인 프랑수아 앙글레르(공동저자인 로버트 브라우트는 2011년 사망)와 두 번째 논문의 저자인 피터 힉스 두 사람이다. 한 자리가 남아있었지만 세 사람 가운데 고를 수는 없었으리라(2014년 구럴닉이 사망했다).

 

올해 78세인 헤이건 교수는 양자역학 수업시간에 학생들에게 ‘변분원리(variational principle)’를 써서 수소원자의 바닥상태 에너지를 구하는 과제를 냈다. 수소원자의 에너지 상태는 양자역학 초창기인 20세기 초 닐스 보어가 벌써 구했지만 다양한 기법을 익히는 과정으로 이런 훈련을 시킨 것. 변분원리는 수소원자의 에너지를 나타내는 적당한 함수를 만든 뒤 이를 양자역학방정식(헤밀토니안)에 넣어 풀었을 때 최소 에너지가 나오는 값을 구한 뒤 이를 다시 적용해 함수를 다듬는 방법이다.

 

어느날 헤이건은 이 방법이 수소원자의 바닥상태 에너지뿐 아니라 여기상태에도 적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방문교수로 와 있던 타머 프리드먼 박사와 함께 연구에 착수했다. 이들은 교묘하게 조작을 통해 궤도각운동량양자수(l)에 따른 바닥에너지상태를 구하는 수식을 얻었다. 이 수식은 감마함수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데, 궤도각운동량양자수가 무한대에 수렴할 경우 수식이 월리스 방정식으로 전환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두 사람은 이 연구결과를 세 쪽짜리 논문으로 정리해 ‘수리물리학저널’에 보냈고 다음날 게재확정통보를 받았다고 한다.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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