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바로가기본문바로가기

동아사이언스

[응답하라 1988] 다이얼 전화기 앞에서 그의 전화를 기다리던 시절

통합검색

[응답하라 1988] 다이얼 전화기 앞에서 그의 전화를 기다리던 시절

2015.11.27 19:30
tvN 제공
tvN 제공

 

천재 바둑 소년 택이가 국제 바둑 대회에서 중국 팀에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고 귀국하던 날, 덕선이와 친구들은 모두 전화기 앞에서 택이의 전화를 초조하게 기다립니다. 택이가 우승하고 돌아오면 친구들에게 피자를 사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이죠. 당시 피자는 우리나라에 소개된 지 얼마 안 된 외식 신문화였습니다.

 

마침내 택이의 전화가 오고 전화를 받은 친구들은 후다닥 집을 뛰쳐나갑니다. 아마 택이는 집에 도착해 전화기를 붙잡고 친구들에게 한명씩 전화를 돌렸겠죠. 요즘 같으면 단체 문자를 보내거나 메신저 단톡방에서 간단히 나오라는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일일이 전화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도 전화라도 있는게 어디인가요? 1988년이면 전화 가입자 1000만명을 넘어서며 전화가 완전히 대중화되던 시기입니다. 쌍문동 골목 친구네 집에도 모두 전화기가 한대씩 있는 것을 볼 수 있지요. 70년대만 해도 ‘아파트 한 채 값'만큼 비쌌던 전화기는 80년대를 거치면서 급속히 가정에 보급됩니다. 1896년 경운궁(현 덕수궁)에 업무용 전화가 처음 설치돼 쓰인 이후 모두가 전화 통신의 혜택을 입게 되는데 90년의 시간이 걸린 셈입니다.

 

● 전화기의 원리와 역사

 

전화는 음성을 전기 신호로 바꾸어 먼 곳으로 보낸 후 이를 다시 음성으로 바꾸어 멀리 떨어져 있는 곳에서도 음성 대화가 가능하게 하는 기기입니다. 음성이 송화기의 진동판을 떨게 하면 진동판 뒤 탄소가루의 밀도가 변해 전기저항과 전류에 순차적으로 변화가 옵니다. 이 신호가 전화선을 타고 상대방 수화기에 이르면, 수화기에 있는 코일에 전류를 흘려 자력선 변화를 일으키고 이 변화가 진동판을 떨리게 하면서 음성으로 복구됩니다.

 

초기의 전화는 수신기와 송신기가 따로 있었고, 핸들을 돌려 교환국에 신호를 보내 통화를 요청해야 했습니다. 이후 다이얼 전화기가 나왔습니다. 0~9까지 숫자가 둥글게 배열돼 있고, 각 숫자 밑에 있는 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돌리면 각 숫자만큼 펄스가 발생해 전화 교환기에 연결을 요청합니다. 1892년에 이미 관련 특허가 나왔지만 실제 상용화된 것은 1919년이었습니다. 이후 60년 이상 전화기를 대표하는 이미지로 굳어졌습니다.

 

버튼을 눌러 전화를 거는 버튼식 전화기는 1960년대에 상용화됐습니다. 버튼을 누르면 고유 주파수가 발생해 연결을 원하는 전화번호를 교환기에 알려줍니다. 1960~1970년대 미국 실리콘밸리 지역에는 휘파람 등으로 이 주파수를 재현해 공짜 통화를 하는 원조 ‘해커'들이 있었는데요, 당시 컴퓨터 오타쿠였던 청년 스티브 잡스가 이들과 어울리며 전자공학에 대한 꿈을 키웁니다 .

 

그레이엄 벨이 1892년 뉴욕에서 시카고로 전화를 걸고 있다. - 위키피디아 제공
그레이엄 벨이 1892년 뉴욕에서 시카고로 전화를 걸고 있다. - wikipedia 제공

1876년 미국의 그레이엄 벨이 처음 발명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만, 2002년 미국 의회도 이탈리아인 발명가 안토니오 무치를 전화기의 최초 발명자로 인정했습니다. 무초는 16년이나 앞서 전화를 발명했음에도 특허를 유지할 비용이 없어 발명자로 인정받지 못 했습니다. 벨 역시 그레이라는 사람보다 2시간 앞서 특허를 신청하는 바람에 전화 발명자로 알려질 수 있었죠.

 

19세기 말은 전기 전자 분야에 폭발적인 연구 및 상용화 경쟁이 벌어지던 시기였고 전화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방식과 소재를 가지고 보다 또렷하고 안정적인 통화 기술 개발 경쟁에 나섰습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탄소 소재 전송기를 만들어 통화 품질 향상에 기여했습니다.

 

우리나라에 전화가 처음 들어온 건 1882년이라고 합니다. 청나라에 견학 다녀 온 사절단이 들고 왔다고 합니다만, 이후 정정이 불안해 실제 설치되지는 못 했습니다. 1896년에 이르러 경운궁과 다른 정부 부서를 연결하는 전화망이 연결돼 실제 운용되기 시작합니다. 1902년에는 민간 전화 사업도 시작했습니다만, 1905년에도 가입 신청은 30곳 정도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가정에 전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이후입니다. 경제 발전에 속도가 붙으면서 전화 수요도 커졌습니다. 전화 가입자는 1961년 12만대에서 1970년 50만대, 1975년 100만대를 넘어섭니다.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지만 전화기 공급은 그에 미치지 못 했습니다. 전화선 공급이나 교환기 성능이 수요를 못 따라간 탓이 큽니다.

 

당시 전화를 신청하면 설치되기까지 1년 이상 걸렸고, 양수양도가 가능한 이른바 ‘백색 전화'의 가격은 작은 집 한채 값에 해당하는 20만원까지 치솟았습니다. 정부는 전자식 교환기 개발과 광통신선 개발 및 구축 등의 정책으로 전화 보급 문제를 해결해 나갔습니다.

 

● 이동통신 시대의 개막

 

하지만 요즘 젊은 세대나 청소년들에게는 꼬불꼬불한 코드가 달린 이런 유선 전화가 매우 낯설게 여겨질 것입니다. 휴대폰이 등장하면서 유선 전화는 빠르게 사라지고 있습니다. 

 

코드가 없는 가정용 무선 전화기는 1988년 당시 이미 가정에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살림이 넉넉한 정환이네는 무선 전화기를 쓰고, 다른 친구네 집에는 일반 전화기가 있죠. 무선 전화기는 국내에 1990년대 이후 널리 보급됩니다 .

 

tvN
tvN '응답하라 1988' 제공

그런데 그거 아세요? 1988년에 이미 오늘날 우리가 쓰는 이동통신이 상용화됐다는 사실이요. 1984년 한국이동통신이라는 회사가 차 안에서 쓸 수 있는 이동통신 서비스, 즉 ‘카폰' 사업을 시작합니다. 카폰 한대 값이 포니 승용차 한대 값과 비슷했지만, 밖에서 돌아다니면서 통화를 할 수 있다는 놀라움은 대단했지요. 이 회사는 이어서 1988년 아날로그 방식 이동통신 서비스를 시작합니다 .

 

1984년 모토로라가 출시한 세계 최초 휴대폰 다이나택 8000 - wikipedia 제공
1984년 모토로라가 출시한 세계 최초 휴대폰 다이나택 8000 - wikipedia 제공

그러다 1996년 우리나라 이동통신 산업이 급성장하는 계기가 되는 일이 생깁니다. 바로 코드분할다중접속(CDMA) 방식의 디지털 이동통신 기술을 채택한 것입니다. 미국 퀄컴의 원천 기술을 바탕으로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이 공동개발해 기술 지분을 확보합니다.

 

이동통신이 급격히 보급되면서 우리나라는 ‘이동통신 강국, IT 강국'으로 세계의 주목을 받습니다. 현재 우리나라 이동통신 가입자 수는 전체 인구보다도 많습니다. 반면 공중전화와 유선 전화는 급격히 힘을 잃어가지요. 1982년 시작된 무선호출기(삐삐)도 90년대 초중반 반짝 큰 인기를 얻다가 휴대폰에 밀려 사라집니다.

 

2003년 WCDMA 방식의 3세대 이동통신 기술이 상용화되면서 휴대폰의 중심이 음성 통화에서 데이터로 이동하기 시작합니다. 무선 환경에서도 초고속 인터넷 사용이 가능해졌기 때문입니다. 2012년에는 영화 1편을 1분 안에 받을 수 있는 LTE 기술이 3세대 통신을 대체했습니다. 초고속 무선 인터넷은 스마트폰과 결합하면서 우리의 생활을 완전히 바꾸어 버립니다.

 

이제 우리는 전화기가 아니라 작은 컴퓨터를 들고 다니는 셈입니다. 그러면서 전화라는 개념도 희미해져 가고 있습니다. 젊은 세대는 음성 통화를 힘들어 하고 메신저로 대화하는데 익숙해졌습니다. ‘목소리’를 전해준다는 것이 전화의 가장 놀라운 기능이었는데, 지금은 목소리 자체가 사진, 동영상, 메시지, 텍스트 등 스마트폰에서 처리할 수 있는 수많은 디지털화된 정보의 하나에 불과하게 되었습니다.

 

스마트폰 - pixabay 제공
스마트폰 - pixabay 제공

 

● 통신과 국가 정책 역할

 

전화 얘기를 하면서 통신 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을 듯 합니다. 통신은 전국에 통신망을 깔고 운영해야 하고, 한번 인프라가 깔리면 막대한 비용 문제 때문에 후발 경쟁자가 참여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민간 기업의 참여가 쉽게 이루어지기 힘든 분야입니다. 그래서 미국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국가에서 국영 통신 기업이 통신 사업을 독점했습니다. 물론 통신망이 대부분 구축된 현대에 와서는 다시 민영화를 통해 효율성을 높이는 방향으로 정책 방향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나라 통신의 발전에 있어서도 정부가 핵심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1984년의 국산 디지털 전자교환기(TDX-1) 개발과 CDMA 이동통신 기술 채택은 국가가 직접 과학기술 개발의 목표를 설정하고 자원을 집중해 성과를 끌어낸 대표적 정책 성공 사례로 꼽힙니다.

 

앞서 말씀드렸듯 1980년대 초까지 전화 설치 적체 현상을 심각했습니다. 원인 중 하나가 바로 교환기의 성능 문제였습니다. 정부는 첨단 전자식 교환기를 국산화하기로 결정합니다. 전기통신연구소(현 ETRI) 연구원들은 “개발에 실패하면 어떤 처벌도 달게 받겠다"는 서약서를 쓰고 개발에 나섭니다. (공밀레의 또 하나의 사례네요.) 1982년부터 5년간 연인원 1300명, 예산 240억원이 투입됐습니다. 당시 전기통신연구소 연간 예산이 24억원이던 시절입니다.

 

결국 우리나라는 세계 10번째 디지털 전자교환기 개발 국가가 됩니다. TDX 국산화가 성공적으로 이뤄져 1987년 전화 가입자 1000만명을 돌파했고, 신청 즉시 전화 설치가 가능해졌습니다. 통신 강국의 밑바탕이 놓인 것이죠. 정부는 무리해보이는 이 연구개발 과제에 자원을 집중함으로써 전화 보급 문제를 해결했을 뿐 아니라 첨단 통신 기술과 경험을 대거 확보하는 성과를 거뒀습니다 .

 

이 성공 방식은 이후 CDMA 도입에 재현됩니다. GSM 방식에 밀려 비주류이던 퀄컴의 CDMA 기술을 과감히 도입해 ETRI와의 공동 연구 개발로 기술력과 특허를 확보합니다. 국내 통신사들이 CDMA 방식으로 서비스를 운영하며 경험을 쌓고, 국내 업계에 쌓인 이 노하우를 바탕으로 해외에 진출해 시장을 확보합니다. 우리나라를 세계적 통신 강국으로 만든 정책이었습니다.

 

이는 과학기술 연구개발 활성화를 위한 정부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좋은 연구 사례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후로 정부가 지속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려는 경향이 생긴 것은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고 봐야겠죠. 경제가 발전해 정부가 시장의 변화를 따라잡지 못 하는 상황에서, 정부의 개입은 민간의 발목을 잡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 필자소개
한세희. 연세대를 졸업하고 전자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하며 인터넷, 소셜 미디어, 모바일 등의 분야를 열심히 취재했다.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의 발달 속에서 변화하는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이 크다. 기술과 세상의 변화를 따라다니며 쉽게 풀어쓰고 싶어한다. 요즘은 조직에 얽매이지 않고 잉여 인간 체험 중이다.
 

이 기사가 괜찮으셨나요? 메일로 더 많은 기사를 받아보세요!

댓글 0

7 + 6 = 새로고침
###
    과학기술과 관련된 분야에서 소개할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 고발 소재 등이 있으면 주저하지 마시고, 알려주세요. 제보하기

    관련 태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