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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호’] 호랑이, 사람에게 쫓겨 산 속으로 들어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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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대호’] 호랑이, 사람에게 쫓겨 산 속으로 들어가다

2015.12.16 11:55
2015년 12월 16일 개봉하는 영화 ‘대호’ 조선에 마지막 남은 호랑이와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 &credit 제공 제공
2015년 12월 16일 개봉하는 영화 ‘대호’ 조선에 마지막 남은 호랑이와 그에 얽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뤘다. - &credit 제공 제공

<편집자 주> 영화 ‘대호’가 오늘(16일) 개봉했습니다. 지리산에 살고 있던 마지막 호랑이를 잡으려는 일본군과 ‘산군(호랑이 중의 호랑이를 호칭하는 말)’을 지키려는 어느 사냥꾼(최민식)의 이야기입니다. ‘대호’ 덕분에 호랑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고, 이에 조선 시대에 살았던 호랑이의 삶에 대해 알려드립니다. 매일 업데이트 되는 소식, 놓치지 마세요~!

 

영화 ‘대호’가 개봉을 앞둔 가운데 한국 호랑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과연 한국에서 호랑이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사라졌을까.  - (주)동아사이언스 제공
영화 ‘대호’가 개봉을 앞둔 가운데 한국 호랑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과연 한국에서 호랑이는 어떻게 살고, 어떻게 사라졌을까.  - 과학동아 2013년 8월호, 전규만 그림

“각종 기록을 보면 호랑이는 조선시대까지도 한반도에 흔했다. 인적이 드문 산이 아니라 강가 수풀에서도 태연히 놀거나 사냥하는 모습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이런 상태로 호랑이는 수천 년 동안 한반도에서 한민족과 더불어 살았다. 그런데 지금은 호랑이를 전혀 볼 수 없다. 어떤 일이 벌어졌던 걸까.”

 

○ 물과 불에 쫓겨 산으로 숨어들어가다

 

한반도에서 범이 사라지게 된 원인은 무엇일까. 농지개간으로 서식지가 감소한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다. 예로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농업 개발은 15세기에 본격화됐다. 그 이전까지, 강가는 사람들이 가끔 시초(땔나무로 쓰던 풀)를 채취하거나 사냥을 하던 곳이 었다. 하지만 개간이 이뤄지고 나서는 일상적으로 생산 활동을 하는 공간이 됐다. 주로 천방(川防), 방천(防川), 보(洑)와 같은 새로운 수리 시설이 설치됐다. 이는 강가에 수리시설을 짓고 논(무논, 수전)을 마련한 것을 의미한다. 소하천의 물을 이용해 농사를 짓고, 이 과정에서 강가에 자생하고 있던 숲을 제거해 농경지로 바꿨다. 문제는 이곳이 식생이 풍부해 호랑이가 즐겨 찾던 곳이라는 점이다. 물가를 빼앗긴 호랑이는 결국 산속으로 들어갔다.

 

17세기에서 19세기에는 산에 불을 지르는 화전이 극성을 부렸다. 과거 수전의 개발은 생산력의 증가로 이어지고, 그 결과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다. 늘어난 인구를 부양하기 위해 더 많은 농경지가 필요해졌다. 수전으로 부족해지자 사람들은 산골짜기와 중턱에 화전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화전은 지력을 고갈시킨다. 사람들은 한번 개발한 화전을 몇 년간 버려두고 다시 새로운 지역에서 화전을 개발했다. 이런 방식은 호랑이와 표범이 살아가는 공간을 이전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잠식했다. 안 그래도 수전 때문에 숲으로 떠밀려 간 호랑이는, 천변보다 식생이 부족해 먹잇감의 밀도가 낮은 산 속 서식공간에서도 오갈 곳이 없게 됐다. 호랑이와 표범의 서식지가 급격히 줄어들자 호환이 기승을 부렸다. 이 시기의 연대기를 보면 “호랑이가 마을과 마을 사이를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있다” 같은 기록이 일상적으로 등장하고 있다.

 

더구나 비슷한 시기에 유행한 우역 바이러스는 먹이 마저 앗아갔다. 소 등 우제류에만 감염되는 이 바이러스는 1636년 5월 만주에서 조선으로 전파됐다. 한 번 들어온 우역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조선의 소는 주기적으로 우역에 걸리게 됐다. 그런데 사람이 산지에서까지 살기 시작하면서 우역은 가축(소)에서 야생 동물(사슴)로 전파됐고, 병자호란 이후에는 사슴이 거의 멸종 단계에 들어섰다. 개마고원 등 고산지대와 섬, 바닷가 정도에서만 사슴을 볼 수 있을 정도였다. 사슴은 당시 호랑이의 주요 먹이였다. 먹을 게 없어진 호랑이는 먹이를 찾아 점점 마을로 내려왔고, 호환은 더 늘었다.


○ 공물과 돈을 위한 사냥감이 되다

 

사냥도 중요한 이유였다. 호랑이 사냥은 당시 유통되던 가죽의 양으로 간접적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내용이 흥미롭다.

 

15세기에는 호랑이와 표범의 출현이 늘어난 이후 호피와 표피의 사용량이 늘어났다. 당시 시행된 포호 정책은 ‘위민제해(백성을 위해 해로운 것을 없앤다)’라는 성리학적 통치 이념을 실현하는 과정이었다. 따라서 호랑이가 많이 나타나면 백성을 위해 잡았고, 그 결과 부수적으로 호랑이 가죽 사용도 늘었다.

 

(주)동아사이언스 제공
과학동아 2013년 8월호, 전규만 그림

 

하지만 17세기 후반이 되자 사정이 바뀌었다. 두 차례의 호란에서 승리한 청이 중원을 장악하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그 비용을 조선에게 공물로 요구했다. 조선은 청이 강요하는 공급량을 조달하기 위해 전에 잡던 수량의 호피와 표피를 먼저 보내고, 추가로 더 많은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해야 했다. 그 결과 기록에는 호피와 표피의 사용량이 늘어난 이후 호랑이와 표범의 출현도 늘어났다(사냥을 하러가서 만나게 됐다).

 

이후 중원을 완전히 장악한 청이 표피 공물을 감면하고(1711년), 조선 역시 호속목(호랑이를 잡아주는 대가로 면포나 쌀 등을 징수하는 제도)을 폐기하면서 (1728년) 호피와 표피의 강제 조달을 중단했다. 하지만 이미 늦어서 18세기 후반에는 한반도 대부분에서 호랑이와 표범의 서식지가 축소됐고, 서식지에서도 개체수가 크게 감소했다. 야생에서 사람들이 발견한 개체수를 봐도, 17세기까지 2~5마리 가량의 집단도 발견됐지만 18세기 이후에는 한두 마리가 대부분이었다.

 

경제적 이윤도 큰 동기였다. 가죽은 값비싸고 중요한 자원이었다. ‘만기요람’에 나타난 호랑이 가죽과 표범 가죽의 값은 각각 쌀로 13석 5두(약 1200L)와 20석(1800L)이었다. 당시 최고급 기술자인 궁장(활과 화살을 만드는 장인)의 임금으로 따지면, 각각 500일치와 750일치 임금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2013년 2월 기준으로 환산해보면 1억 3500만 원(호랑이 가죽)에서 2억원(표범 가죽)에 달하는 금액이다. 이렇게 값비싼 호피는 국내에서 고가의 물품을 거래할 때나, 국제무역에서 고액의 상품을 결제할 때 널리 사용됐다.(계속)

  

(여기서 잠깐!) 한 해 1000마리가 사냥됐다?


사냥된 호랑이나 표범의 수는 얼마나 많았을까. 15~16세기의 자료를 보면 성종 무렵에는 창고에 수만 장의 호피가 쌓인 채 썩어가고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일본이 대마도를 통해 1000여 장의 호피를 구하는 대복도 있다. 17세기 전반 비변사의 논의에서는 전국 220여 개 군현에서 매년 3장 씩의 호피를 진상했다고 나와 있다. 단순하게 계산해도 전국에서 매년 1000여 마리의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했다는 뜻이다.

 

기록에는 호랑이와 표범 가죽이 섞여 있다. 각각의 비율은 어땠을까. 18~19세기에 작성된 탁지지나 만기요람을 보면, 조선 국왕이 19세기 초에 받게 된 명목상(값으로 환산하여 받아들이는)의 호피와 표피는 각각 26장과 85장이었다. 청에 조공으로 바치는 예단은 각각 27장(호피)와 30장(표피)이었으며, 일본 측에 매년 보내는 회사품은 각각 12장(호피)과 16장(표피)이었다. 즉 호피나 호송목 등으로 표현된 호랑이의 절반 이상은 사실상 표범이었다. 역사 기록에는 호랑이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게 나타나지만, 표피 사용량을 통해 추정해보면 한반도에서 살며 사냥된 수는 표범이 호랑이보다 더 많다. (☞ 다음편 보러 가기)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한국 호랑이의 흔적. 다시 백두대간에서 만날 날은 언제일까.  - 동아일보 제공
사진으로만 볼 수 있는 한국 호랑이의 흔적. 다시 백두대간에서 만날 날은 언제일까.  - 동아일보 제공

 

 

☞ 이전 화: [영화 ‘대호’] 호랑이는 일제강점기에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다

☞과학동아 원문 “조선 초기 호랑이는 물가에 살았다” 보러가기☜

 

<필자 소개>

김동진 전 서울대 수의대 BK부교수
한국교원대학교 역사교육과 강사이자 (사)한국범보전기금 인문학술이사, 인간동물문화연구회 공동연구원이다. 전 서울대 BK 연구교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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