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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노케미족으로 살 수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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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노케미족으로 살 수 있나?

2016.06.13 17:51

법령에 의해 지도하고 형벌에 의해 규제하면 백성들은 형벌만 면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슨 짓을 하든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에 비해, 도덕에 의해 지도하고 예에 의해 규제하는 경우에는, 도덕적인 수치심을 갖고 더 나아가 바른 사람이 된다.
- 공자, ‘논어’에서

 


소설가나 번역가의 직업병이 요통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그런가보다 했다. 그런데 2년 전 ‘Breasts(가슴이야기)’라는 책을 번역하다 ‘허리가 나가’ 오랫동안 고생했다. 200자 원고지로 1500매가 넘는 분량을 번역하느라 몇 달 동안 거의 매일 서너 시간씩 꼼짝하지 않고 앉아 있었더니(번역은 약간 중독성이 있는 작업이다) 허리 근육이 못 버텼나보다.
  

이 책의 저자인 플로렌스 윌리엄스는 여성이라는 성별의 이점을 최대한 살려 각종 실험에 직접 참가했고 그 체험담을 책 곳곳에 실었다. 6장 ‘너무 일찍 온 사춘기’에는 가습기살균제 사태로 요즘 우리사회의 화두가 되고 있는 ‘노케미족’의 생활, 즉 화합물 없는 삶을 산 체험이 그려져 있다. 즉 저자와 일곱 살인 딸은 3일간 노케미족 생활을 한 뒤 ‘유리병’에 소변을 보고 분석을 해 그 전에 보낸 소변시료와 비교하는 실험에 참가했다.


필자는 이 부분을 읽으며 희망과 절망을 동시에 느꼈다. 먼저 밝은 측면은 불과 3일 동안의 노케미족 생활로도 많은 화합물의 체내 수치가 뚝 떨어졌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환경호르몬으로 지목되는 비스페놀A의 경우 5.1ppb에서 0.8ppb로 84%나 떨어졌다. 비스페놀A의 반감기(체내농도가 절반으로 되는데 걸리는 시간)가 반나절이기 때문이다. 생활용품의 살균제로 쓰이는 트리클로산의 경우도 141에서 1.3으로 99%나 떨어졌다.


어두운 면은 현대사회에서 노케미족 생활을 하는 게 너무 힘들다는 것이다. 이 기간 동안 저자는 가공식품은 물론이고 커피나 포도 등 운반이나 포장 과정에서 플라스틱과 접촉한 농산물도 멀리했다. 빵도 종이에 싸여있는 걸 찾아 샀고 채소 역시 저자가 직접 맨손으로 집어 천 봉투에 담았다. 또 사료와 물에서 화합물을 흡수하는 가축에서 얻는 육류는 물론 비닐에 싸여 있는 치즈도 피했다. 그 결과 3일 동안 저자의 몸무게가 1.5킬로그램이나 줄었다! 과연 이런 생활을 30일, 300일 동안 지속할 수 있을까?

 

최근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재조명되면서 일상생활에서 합성화합물이 포함된 제품을 쓰지 않으려는 사람들(노케미족)이 늘고 있다. - pixabay 제공
최근 가습기살균제 문제가 재조명되면서 일상생활에서 합성화합물이 포함된 제품을 쓰지 않으려는 사람들(노케미족)이 늘고 있다. - pixabay 제공

40년 악법 마침내 손보기로


글 앞에 인용한 ‘논어’ 위정편(爲政篇)은 맞는 말이긴 한데 너무 이상적인 얘기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날 노케미족 생활을 하기가 어려운 건 고사하고 가습기살균제 사태처럼 일상생활을 하다 자칫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환경에 처한 건 화합물 관련 법령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기 때문 아닐까.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의 또 다른 스트레스 요인인 미세먼지 사태만 봐도 그렇다. 즉 주요 원인 가운데 하나로 지목되는 디젤차의 범람도 결국 잘못된 법령이 판을 깔아줬기 때문이다. 환경문제로 승용차 시장에 진출하지 못하던 업체들은 획기적인 매연저감기술을 개발했다고 주장했고 정부는 2005년 디젤 승용차를 허용했다. 결국 세계 자동차 업계의 음모(또는 사기?)가 법으로 정당화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호흡기질환으로 고생하게 됐다(물론 통계적인 얘기로 누가 희생양이 될지는 모른다).       


학술지 ‘네이처’ 6월 2일자에는 생태와 환경의 관점에서 악명 높은 법이었던 미국의 유해물질규제법(TSCA)이 1976년 제정된 지 40년 만에 마침내 개정의 수순을 밟았다는 사설과 뉴스가 실렸다. 즉 5월 24일 미 하원이 403대 12의 압도적인 표차로 개정을 하기로 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유해물질을 규제하는 법이 왜 악법일까?


이 법에는 2차 세계대전 이래 세계 경제 패러다임을 지배해온 미국의 친기업, 친자본 정신이 농축돼 있다. 즉 어떤 회사가 새로운 화합물을 만들 경우 기본적으로 그 화합물은 유해하다는 증거가 나오지 않는 한 무해하다.

 

바꿔 말하면 회사가 새 화합물은 내놓으면서 ‘아무 문제가 없다’는 몇 가지 기본 데이터만 제출하면 시장에 나갈 수 있다는 말이다. 자세한 데이터를 요구할 경우 ‘기업비밀’이라며 버틸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미국에서만 매년 700가지 새로운 화합물이 목록에 올라 현재 유해물질규제법에 등록된 화합물만 8만5000가지라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가습기살균제 원료로 같은 맥락 아닐까.


원래 이런 화합물의 상용화 여부를 결정하는데 주도적으로 관여해야할 미 환경보호청(EPA)은 실제로는 힘이 별로 없다. 따라서 어떤 화합물로 인한 사고가 터졌을 때 또는 수많은 논문에서 문제가 부각돼 더 이상 외면하기 힘들 때야 비로소 화합물에 대한 집중 조사가 진행되고 그 결과 사용이 금지되기도 한다.

 

결국 그 사이 노출된 사람들만 고스란히 피해를 보는 셈이다. 이런 난맥상이다보니 목록에 오른 8만5000가지 화합물 가운데 현재 미국에서 몇 가지가 쓰이고 있는지는 ‘며느리도 모른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까지 미 정부에서 안전성을 검토한 화합물은 이 가운데 2%에 불과하다.


그동안 법 개정 시도가 몇 차례 있었지만 막강한 업계의 로비로 번번이 좌절되다 유럽의 친환경적인 정책으로 인한 압박(비교를 통한 미 국민들의 불만 고조)과 화합물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는 세계적인 추세에 정계와 업계가 마침내 두 손을 든 것이다. 온실가스협약비준을 끝까지 거부하다 오바마 행정부에 와서야 전향적으로 참여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과 맥락을 같이 하는 움직임이다.

 

구조가 비슷한 화합물은 활성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 구조에 따라 공간에 화합물을 배치한 그림으로 피부자극이 있는 물질(짙은 청색)과 없는 물질(하늘색)이 어느 정도 무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란색은 아직 특성을 모르는 물질이다. 이처럼 안전성이 알려진 화합물의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비교분석하면 새로운 화합물의 안전성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 알텍스 제공
구조가 비슷한 화합물은 활성도 비슷한 경우가 많다. 구조에 따라 공간에 화합물을 배치한 그림으로 피부자극이 있는 물질(짙은 청색)과 없는 물질(하늘색)이 어느 정도 무리져 있음을 알 수 있다. 노란색은 아직 특성을 모르는 물질이다. 이처럼 안전성이 알려진 화합물의 데이터를 체계적으로 비교분석하면 새로운 화합물의 안전성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 알텍스 제공

데이터도 꿰어야 보배


앞으로 법이 개정되면 새로운 화합물은 물론이고 기존 화합물에 대해서도 광범위한 안전성 시험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이 과정에서 기업과 정부는 엄청남 비용을 들여야 하고 수많은 실험동물의 희생이 따를 것이다. 그렇다면 최소의 비용과 희생으로 이런 효과를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미국 존스홉킨스대의 독성학자 토마스 하텅 교수는 지금까지 발표된 안전성 데이터만 잘 활용해도 불필요한 실험을 대폭 줄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관련해 하텅 교수팀은 최근 학술지 ‘알텍스(ALTEX, 동물실험대안의 영문 머리글자)’에 논문 여러 편을 발표했다.

 

즉 2007년 제정된 EU의 법률 ‘리치(REACH, 화합물의 등록 평가 인증 제한의 영문 머리글자)’에 따라 지금까지 등록된 9800여 화합물에 대한 81만6000건의 서류를 체계적으로 분석하면 다른 화합물이나 새로운 화합물의 안전성을 예측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는 얘기다. 즉 화합물 안전성 관련 빅데이터를 활용하면 불필요한 동물실험이나 중복실험을 크게 줄일 수 있다.


이들의 방법은 ‘구조가 비슷하면 작용도 비슷하다’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즉 게놈서열을 비교분석해 생물종들의 관계를 규명하는 계통분류학처럼 구조에 기초해 분자들을 분류한 뒤 안전성 데이터가 있는 가까운 화합물을 통해 그 화합물의 안전성을 추측한다는 말이다. 실제로 구조에 따라 배치한 여러 화합물들의 피부자극성 여부를 표시한 그림을 보면 자극이 있는 물질들과 없는 물질들이 어느 정도 몰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함께 특정 화합물에 대한 안전성 실험을 업체마다 나라마라 중복해 할 것이 아니라 한 번을 하더라도 큰 단위에서 제대로 하는 게 중요하다는 의견도 있다. 예를 들어 화합물의 안자극, 즉 눈의 점막에 자극을 주는가 여부를 보는 시험의 경우 실험결과 보고서가 무려 90편이나 되는 화합물도 있다. 이런 쓸데없는 실험에 비용을 들이고 동물(토끼)을 괴롭힐 필요는 없다는 얘기다. 따라서 안전성 실험 과정과 결과 기재양식을 표준화해 공유하는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


물론 ‘구조로 작용을 추측한다’는 논리가 늘 먹혀들어가는 건 아니다. 구조가 약간 바뀌었을 뿐인데도 전혀 다른 특성이 나타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이를 ‘활성의 절벽(activity cliffs)’라고 부른다. 이에 대해 하텅 교수는 “안전성의 과학에서 절대적인 확실성은 환상일 뿐”이라며 구조에 기반한 방법이 불완전하지만 꽤 유용하다고 강조했다.

 

1990년대 마리 노트 향수의 대유행을 불러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캘론의 분자구조. 최근 합성화합물로 인한 문제들이 나오면서 이처럼 몇몇 사람들에게 놀라운 경험을 안겨줄 수 있지만 인류의 삶에 꼭 필요하지 않는 새로운 물질을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위키피디아 제공
1990년대 마리 노트 향수의 대유행을 불러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캘론의 분자구조. 최근 합성화합물로 인한 문제들이 나오면서 이처럼 몇몇 사람들에게 놀라운 경험을 안겨줄 수 있지만 인류의 삶에 꼭 필요하지 않는 새로운 물질을 세상에 내놓아야 하는가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 위키피디아 제공

누구를 위해 화합물은 만들어지나


그런데 이 시점에서 문득 ‘이렇게 많은 화합물이 있는데 왜 새로운 화합물을 더 만들려고 할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이 떠오르는 독자들이 있을 것이다. 즉 기존에 나와 있는 화합물만으로도 유해한 걸 추려내는데 엄청난 시간과 비용이 들 텐데 여기에 매년 나오는 수많은 새로운 화합물까지 검토해야 하다니 과연 누굴 위한 일이란 말인가.


전공이 화학인 필자는 오래 전부터 이런 의문을 가졌고 나름 답을 찾기도 했다(자문자답 또는 자기합리화?). 먼저 팔레트 이론이다. 그림을 배울 때는 기본색 몇 가지만 갖고 그림을 그리라고 하지만(물감을 이리저리 섞으면서 색의 원리를 이해하기 위해) 화가들에게 ‘그 물감’이 아니면 안 되는 ‘그 색’이 있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고급 향수에 필수 원료였던 사향(머스크)을 얻으려고 사향노루를 잡다보니 개체수가 줄어 사향이 금값이 되고 급기야 멸종위기에 처하자 결국은 사용이 금지됐다. 다른 천연물질로는 결코 사향을 대신할 수 없다.

 

다행히(?) 화학자들이 다양한 합성 머스크 분자들을 합성해 오늘날에도 향수의 잔향에서 사향을 느낄 수 있다. 20세기 후반 향수의 유행도 자연에는 없는 새로운 화합물이 주도했다. 여름철에 인기인 마린 노트(marine note), 즉 바다가 연상되는 상쾌한 향기를 지닌 향수도 캘론(calone)이라는 분자를 합성하지 못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물론 이 가운데 생분해가 안 되는 등 문제가 드러나 나중에 사용이 금지된 화합물도 여럿 있다.


‘고작 향수 때문에?’ 필자의 팔레트 이론이 설득력이 약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의약품을 떠올려보라. 예전에는 항암화학요법을 받는 사람들은 머리가 다 빠졌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은 환자들도 많다. 효과는 크면서도 부작용은 작은 신약이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대부분은 자연계에는 없는 합성화합물이다. 식물이나 미생물에서 얻은 천연분자 대다수는 불안정해 쉽게 파괴되거나 부작용이 커 구조를 살짝 바꿔 이런 문제를 해결한 분자가 약물로 쓰이는 경우도 많다. 약물 목록에서 합성화합물을 빼버린다면 인류의 평균수명은 뚝 떨어질 것이다.


한편 오늘날 인류가 처한 에너지, 환경 위기를 극복(또는 완화)하는데도 아이러니하게도 새로운 재료, 즉 화합물이 필요하다. 21세기는 재료과학의 시대라는 말도 있지만 고효율의 태양전지 등 환경친화적인 인프라가 갖춰지려면 이를 뒷받침할 새로운 물성을 지닌 화합물이 나와야 한다. 원시 사회로 돌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보다 나아지기 위해서라도 새로운 화합물을 합성하려는 노력을 계속돼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고 노케미족들을 두고 ‘빈대 잡겠다고 초가삼간 태우는 격’이라고 말할 수만도 없다. 옷은 천연섬유만 입고 커피는 머그컵(종이컵 내벽은 플라스틱 필름이 코팅돼 있다)에 마시는 느슨한 노케미족인 필자 역시 이 빈대가 보통 빈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기에.

 

 

※ 필자소개
강석기. 서울대 화학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LG생활건강연구소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으며, 2000년부터 2012년까지 동아사이언스에서 기자로 일했다. 2012년 9월부터 프리랜서 작가로 지내고 있다. 지은 책으로 『강석기의 과학카페』(1~4권, 2012~2015),『늑대는 어떻게 개가 되었나』(2014)가 있고, 옮긴 책으로 『반물질』(2013), 『가슴이야기』(2014)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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