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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망각의 철학과 생명과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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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과 망각의 철학과 생명과학

2014.03.24 18:00

걸러지지 않은 대량의 정보는 지각을 무뎌지게 한다. 이는 몇몇 정신 장애의 원인이 된다.
- 한병철

 

  필자는 최근 독일 베를린예술대학 한병철 교수의 ‘투명사회’를 재미있게 읽었다. 2년 전 우연히 ‘피로사회’를 읽고 깊은 인상을 받았기에, 신간(한국어판)이 나왔다는 걸 알고 얼른 사서 본 건데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한 교수는 독특한 비주류의 관점에서 사회 현상을 해석하는데, 필자가 굳이 비주류 앞에 ‘독특한’이라는 표현을 쓴 건 여기서 말하는 주류는 보수기득권자를 의미하는 게 아니라 오늘날 담론을 주도하는, 어찌 보면 진보적인 관점을 얘기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솔직히 난 그렇게 느끼지 않는데…’라고 생각하더라도 선뜻 의견을 말하기가 꺼려지는(보수꼴통으로 보일까봐) 그런 의미의 주류와 비주류다.

 

  그런데 한 교수는 굉장히 세련된 담론으로 악과 대립하는 게 꼭 선인 것만은 아님을 설득력있게 보여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과거 군사독재 같은 ‘규율사회’에서 지금은 개인이 능력만 있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고 될 수 있는 ‘성과사회’가 됐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현대인들의 삶이 결코 자유롭지는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개인의 성패는 전적으로 자신이 하기에 달려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이 요구에 부응하려고 애쓰다가 지쳐 소진되는 ‘피로사회’가 우리의 맨얼굴이라는 것.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최근 번역 출간된 독일 베를린예술대학 한병철 교수의 ‘투명사회’.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환경에서 투명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신뢰에서 상호통제로 시스템적 전환이 일어나면서 디지털 통제사회가 도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 문학과지성사 제공
최근 번역 출간된 독일 베를린예술대학 한병철 교수의 ‘투명사회’. 정보를 쉽게 얻을 수 있는 환경에서 투명성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신뢰에서 상호통제로 시스템적 전환이 일어나면서 디지털 통제사회가 도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고 있다. - 문학과지성사 제공

  ‘투명사회’ 역시 마찬가지 맥락이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사회 시스템에서 ‘투명성’을 강조하지만 결국 ‘투명사회’는 ‘포르노사회’일 뿐이라는 것. 그러면서 한 교수는 정치를 비롯한 많은 영역에서 불투명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선뜻 수긍이 안 가겠지만 ‘투명사회’를 읽어보면 필자처럼 고개를 끄덕이게 될지도 모른다.

 

  한 교수가 책에서 오늘날 투명사회 도래의 주범으로 꼽는 기업이 둘 있는데 하나가 구글이고 다른 하나가 페이스북이다. 즉 인터넷을 통한 정보의 과다(‘빅데이터’라는 멋진 용어로 표현하기도 한다)와 SNS를 통한 집단 노출증이 투명사회를 만드는 원동력이 됐다는 것. 한 교수에 따르면 정보 사냥꾼이 된 현대인들은 “조급하며 삼갈 줄 모르고” 따라서 “사물이 숙성하게 놓아두지 않고 곧장 달려들어 클릭할 때마다 먹이를 잡아채야” 직성이 풀린다.

 

  그런데 책에서 한 교수가 기억과 저장을 구별하는 대목이 특히 흥미롭다. 즉 “기억은 서사적이라는 점에서 그저 덧붙이고 쌓기만 하는 저장과 구별된다”는 것. 서사, 즉 이야기는 선택 작업이고 따라서 “기억의 자취는 그 역사성 때문에 늘 재정리되고 수정되는 과정에 놓인다”는 말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기억조차 ‘고물가게’로 또는 ‘보존 상태가 좋지 않은 다량의 온갖 이미지와 닳아빠진 상징들이 완전히 뒤죽박죽으로 꽉 차 있는 창고’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물가게는 사물들이 널려 있을 뿐이고 기억도 망각도 하지 못한다.

 

  이 구절을 읽다가 문득 예전에 책인가 논문인가에서 본 한 여성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 사람은 망각을 하지 못하는 ‘병’을 앓고 있다. 즉 20년 전 아무 날을 대도 그날 저녁에 뭘 먹었는지도 기억한다는 것. 이런 믿을 수 없는 기억력의 소유자는 그러나 자신이 너무나도 불행한 삶을 살고 있다고 괴로워한다는 내용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별수 없이 구글에 들어가(한 교수님, 미안해요) 어떤 검색어를 넣을까 잠시 고민하다 ‘woman remember everything’을 치고 리턴을 눌렀다. 놀라운 구글의 검색시스템은 필자의 아련한 기억이 착각이 아니라고 위로해주고 있었다. 필자가 찾던 그 여인의 이야기가 위에서부터 줄줄이 나오는 게 아닌가. 똑똑한 것!

 

  이 가운데 2009년 월간지 ‘와이어드(Wired)’에 실린 글을 프린트해 읽어봤는데, 이 여인이 2008년 ‘The Woman Who Can't Forget’이라는 자기 이야기를 담은 책을 내기도 했단다. 교보문고 사이트에서 이 책 제목으로 검색을 해봤다. 한글판이 있다면 같이 뜨기 때문이다(여기 검색 시스템도 꽤 똑똑하다!). 별로 기대는 안 했는데 2009년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라는 제목으로 한글판이 나왔다. (공교롭게도 필자의 검색어가 한글판 제목의 직역이지만, 물론 필자가 이 책을 읽고도 출처를 기억하지 못했을 정도로 기억력이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아닐 것이다…))

 

  올해 48살인 질 프라이스(Jill Price)라는 미국 여성은 14살 이후 하루하루에 대해 거의 완벽한 기억을 갖고 있다. 프라이스는 어린 시절 어느 날 주위 사람들의 기억력이 형편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자신이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고 한다. 책에 따르면 프라이스의 기억력 발전은 3단계를 거치는데, 8살 미만의 기억은 다른 사람보다 ‘훨씬 뛰어난’ 수준이다. 다음으로 8살에서 13살까지로 대부분의 날짜를 기억하지만 완벽하지는 못하고 기억하기 위해 ‘수 초간’ 노력해야 하는 날도 있다. 끝으로 14살 이후 현재까지는 거의 완벽하게 즉각적으로 기억해낼 수 있다.

 

  “과거의 기억들이 머릿속에 무한 반복되는 가운데,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던” 프라이스는 “머릿속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알고 싶어서 구글에서 ‘기억’으로 검색을 했고, 제일 위에 뜬 기억 연구의 권위자인 캘리포니아대(어바인) 제임스 맥거프 교수에게 ‘2000년 6월 8일’ 이메일을 보낸다.

 

 “텔레비전에 뜬 날짜 자막만 봐도, 자동적으로 그날로 되돌아가 그날 제가 어디 있었고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기억할 수 있습니다. 이런 일은 쉴 새 없이 일어나고 통제불능이라서 정말 저를 지치게 만듭니다.”

 

2006년 학술지 ‘뉴로케이스’에서 과잉기억증후군 사례가 처음 보고된 이래 2013년 11월 현재 25건이 보고됐다고 한다. 이 가운데는 미국 배우 마릴루 헨너도 포함돼 있다. 헨너는 11살 이후 거의 모든 날의 일상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 위키피디아 제공
2006년 학술지 ‘뉴로케이스’에서 과잉기억증후군 사례가 처음 보고된 이래 2013년 11월 현재 25건이 보고됐다고 한다. 이 가운데는 미국 배우 마릴루 헨너도 포함돼 있다. 헨너는 11살 이후 거의 모든 날의 일상을 기억하고 있다고 한다. - 위키피디아 제공

  평소 이런 연락을 많이 받은 맥거프 교수이지만 친절하게 한번 보고 싶다는 답장을 보냈고 6월 24일 연구실에서 두 사람은 만났다. 맥거프 교수는 ‘20세기 매일의 사건사고’라는 책을 갖다놓고 질문을 했는데 프라이스의 놀라운 기억력에 경악한다. 특히 1979년 11월 5일에 무슨 일이 있었냐는 질문과 관련된 에피소드가 압권이다. 이 질문에 프라이스는 “월요일인데 특별한 일은 없었다. 하지만 전날은 이란 학생들이 테헤란에 있는 미국 대사관에 난입했던 사건이 있었다”고 답한다. 맥거프 교수는 그 사건이 11월 5일에 있었다고 정정했지만 프라이스는 4일이라고 고집했다. 결국 맥거프 교수는 책을 보여줬지만 프라이스는 책이 잘못된다고 버텼다. 결국 다른 문헌으로 확인해보자 책이 틀렸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2006년 맥거프 교수는 학술지 ‘뉴로케이스’에 프라이스의 사례를 보고하면서 ‘과잉기억증후군(hyperthymestic syndrome)’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사용했다. 그 뒤 지금까지 과잉기억증후군에 해당하는 사례가 25명 보고됐고, 이들 대다수는 프라이스처럼 10대 초반부터 하루하루를 기억하는 경이로운 능력을 갖게 됐다고 한다.

 

  한편 과잉기억증후군인 사람들의 기억력은 서번트증후군인 사람들의 기억력과는 성격이 다르다. 즉 책을 통째로 외우는 서번트의 기억력은 일종의 스캐너인 반면, 과잉기억인 사람들은 자기 주변, 즉 일상의 에피소드를 세세히 기억한다는 것. 예를 들어 이런 것이다.

 

 “1999년 3월 28일 일요일에는 특별한 사건은 없었지만 그날 역시 기억할 수 있다. 어머니와 함께 엔치노 글렌 카페에서 아침을 먹었다. 나는 스크램블 에그를 시켰고 두통 때문에 머리가 좀 아팠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여자’ 57쪽)

 

●망각의 단백질 찾아

 

  이런 비범한 기억력이 삶을 살아가는데 오히려 장애가 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사실은 기억뿐 아니라 망각도 뇌의 ‘기능’일 거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체험, 즉 오감을 통해 밀려드는 정보더미가 과잉기억증후군인 사람들처럼 그대로 쌓여 시도 때도 없이 떠오른다면 내 삶을 편집해 의미를 끄집어낼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즉 건강한 기억은 “최대한 많은 걸 유지하는 게 아니라 불필요한 걸 잊어버리는 능력”에 있다는 말이다.

 

  기억형성에 대한 연구는 꽤 있지만 상대적으로 기억상실, 즉 망각에 대한 연구는 드물다. 고전 심리학은 기억상실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을 제시했다. 먼저 ‘부식 모형(decay model)’으로, 세월이 지나면 물건이 닳듯이 기억도 조금씩 손상되면서 사라진다는 것. 어찌 보면 상식적인 관점이다. 다른 하나는 ‘간섭 모형(interference model)’로 망각은 여러 기억 사이의 경쟁의 결과 밀려난 기억이 사라지는 현상이라는 것이다. 즉 뇌의 기억용량이 제한돼 있다는 말이다. 이 두 모형은 망각을 수동적인 현상으로 본다는 공통점이 있다.

 

학술지 ‘셀’ 최근호에는 예쁜꼬마선충의 망각 메커니즘을 밝힌 연구결과가 실렸다. 이에 따르면 무사시라는 단백질이 뉴런에서 세포골격단백질 액틴의 구조화를 막아 체험이 기억으로 남지 못하게 한다. 사진은 예쁜꼬마선충의 신경계다. - 셀 제공
학술지 ‘셀’ 최근호에는 예쁜꼬마선충의 망각 메커니즘을 밝힌 연구결과가 실렸다. 이에 따르면 무사시라는 단백질이 뉴런에서 세포골격단백질 액틴의 구조화를 막아 체험이 기억으로 남지 못하게 한다. 사진은 예쁜꼬마선충의 신경계다. - 셀 제공

  그런데 최근 망각이 기억형성만큼이나 능동적인 과정이라는 연구결과가 하나 둘 나오고 있다. 학술지 ‘셀’ 최근호에는 망각 메커니즘을 규명했다는 연구결과가 실렸다. 스위스 바젤대의 연구자들은 모델동물인 예쁜꼬마선충을 대상으로 이런 사실을 확인했다. 즉 무사시(MSI-1)이라는 단백질을 만들지 못하는 선충은 기억력이 오히려 떠 뛰어나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 연구자들은 냄새정보에 대한 기억력을 측정하는 방법을 이용했다.

 

  연구결과 무사시 단백질은 뉴런에서 액틴이라는 세포골격단백질의 구조형성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전 연구를 통해 액틴의 구조형성이 기억구축에 중요한 단계라는 사실이 알려져 있었고 이 과정에는 애두신(ADD-1)이라는 단백질이 관여함이 밝혀졌다. 즉 애두신은 기억형성에 관여하고 무사시는 망각에 관여하는 단백질인 셈이다.

 

  실제로 연구자들은 애두신 유전자가 고장나 기억력에 결함이 있는 돌연변이체에 추가로 무사시 유전자에 변이를 일으켰더니 기억력이 정상 수준으로 돌아옴을 확인하기도 했다. 비록 선충을 대상으로 한 실험결과이지만 사람에서도 무사시에 해당하는 유전자가 있기 때문에 이런 능동적인 망각 메커니즘이 분명 존재할 것이다. 결국 과잉기억증후군은 이런 망각 메커니즘에 문제가 생긴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는 말이다.

 

  과유불급(過猶不及), 즉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는 옛말처럼 너무 잘 잊어버리는 것도 문제이지만 너무 많은 걸 기억하는 것도 건강한 상태는 아닌 것 같다. 한병철 교수의 표현을 빌자면 ‘정보의 과다는 사유의 위축으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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