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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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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행복했을까?

2014.11.10 18:00

며칠 전 한 술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사정이 있어 늦게 오게 된 한 분이 대형마트에 들러 안주용 생선회를 사다가 문득 지난 모임에서 마신 와인 생각이 났단다. ‘이름이 뭐더라…’ 와인 매장 앞에서 고민하다 문자메시지를 보내려고 하는데 마침 와인 시음을 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 저 이름 같은데…’ 가까이 가보니 ‘조세피나’라는 칠레와인이었고 마셔보니 정말 찾는 와인이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신기하다고 생각하며 얼른 두 병을 사서 왔단다.

 

얘깃거리가 떨어질 때쯤 혜성같이 등장한 이 분 덕분에 자리는 활기를 되찾았고 어느새 와인 두 병은 비워져 있었다. 필자의 입맛에는 좀 달았지만 알코올 도수도 약간 낮고 향도 달콤한 게 아무튼 여자들이 좋아할 와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뇌가 지쳤을 때는 멍 때리기가 해결책?

 

지난 10월 27일 서울시에서 주최한 ‘멍 때리기’ 대회가 화제라고 한다. 한 시간 반 동안 가장 잘 멍하니 앉아있는 사람을 뽑는 대회라는데 놀랍게도 아홉 살짜리 여자아이가 1등을 했다. 한 신문에서는 이 사실을 크게 다루면서 멍 때리기야 말로 정신없는 사는 현대인들이 정신 건강을 지키는 좋은 방법이라는 정신과전문의의 설명을 곁들이기도 했다.

 

‘과연 그럴까.’ 1, 2분이라면 몰라도 무려 한 시간 반 동안 멍 때리고 있다는 게 정상적인 뇌를 가진 사람에게 가능한(자연스러운) 일일 것 같지 않다. 이게 가능할 정도의 상태라면 멍 때릴 게 아니라 빨리 병원에 가봐야 하는 게 아닐까.

 

문득 분주함과 흘러넘치는 정보로 뇌에 과부하가 걸린 사람들에게 제시할 해결책은 멍 때림이 아니라 삶을 음미하는 데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앞에 소개한 여성분이 만일 이전 모임에서 “부어라! 마셔라!”하며 그 자리를 소비할 뿐 음미하지 않았다면 마트의 에피소드가 가능했을까.

 

현대인에게 필요한 건 멍 때림이 아니라 음미라는 주장은 필자의 생각일 뿐이지만 삶을 음미하는 태도가 중요하다는 건 심리학 분야에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수년 전 필자는 ‘Savoring(음미)’이라는 책을 샀는데, 순전히 책 제목을 ‘음미’하다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한 게 이유다.

 

 

 

삶을 소비할 것인가 음미할 것인가? 미국 로욜라대의 프레드 브라이언트 교수와 미시건대 조셉 베로프 교수는 긍정적인 경험의 새로운 모델로서 음미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 ‘음미’를 2007년 펴냈다. - 강석기 제공
삶을 소비할 것인가 음미할 것인가? 미국 로욜라대의 프레드 브라이언트 교수와 미시건대 조셉 베로프 교수는 긍정적인 경험의 새로운 모델로서 음미의 중요성을 강조한 책 ‘음미’를 2007년 펴냈다. - 강석기 제공

 

즉 음미라는 말이 동서양 공통으로 말의 이차적 의미까지 똑같은 맥락으로 쓰인다는 사실이다. 즉 한자어 ‘음미(吟味)’ 는 원래 맛있는 음식을 천천히 먹으면서 느끼는 기분을 뜻하는 말이지만 멋진 풍경을 보거나 과거의 좋았던 시절을 추억할 때도 이 말을 쓴다. 그런데 영어 ‘savoring’ 역시 마찬가지 용법 아닌가!  음식을 향유하면서 만족한 미소를 짓듯이 행복한 순간을 떠올릴 때도 입가에 잔잔히 미소가 머무르기 마련이므로 동서양 모두에서 이런 의미의 확장이 일어난 것일까. 책을 보면 ‘savor’의 어원인 라틴어 ‘sapere’는 ‘맛보다’ ‘맛이 좋다’ ‘현명하다’라는 뜻이 있다고 한다.

 

서구에서 동양의 명상을 가져다 보급하면서 내건 문구인 ‘지금 여기(here and now)’ 역시 다른 말로 하면 현재를 음미하는 삶의 태도를 강조한 말이다. 그런데 삶을 음미하는 게 정신건강에 좋은 건 그 순간뿐 아니라 시간이 흘러서 좋았던 기억으로 떠올릴 거리도 그만큼 많아지기 때문 아닐까. 실제로 과거의 좋았던 일들을 떠올려 음미하면 심리적으로 긍정적인 효과가 있다는 연구결과가 많다. 부익부 빈익빈이라고 행복했던 추억을 떠올리면 현재의 행복도 커진다는 말이다.

 

●행복한 과거 음미할 때 보상회로 활발해져

 

신경과학 분야 학술지인 ‘뉴런’ 10월 30일자 온라인판에는 ‘과거를 음미하기(Savoring the Past)’라는 어울리지 않는 제목의 논문이 실렸다. 과거를 음미할 때 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밝힌 논문으로 음미의 심리학을 뒷받침하는 신경과학 연구결과인 셈이다.

 

미국 럿거스대 심리학과 마우리치오 델가도 교수팀은 피험자들에게 긍정적인 기억(예를 들어 디즈니랜드에 놀러 갔을 때)과 정서적으로 중성인 기억(예를 들어 장보러 갔을 때)을 하게 한 뒤 각각에 대해 느낌과 정서적 강도를 표시하게 했다. 그 결과 좋았던 일을 기억했을 때 기분이 좋다는 결과를 얻었고 정서도 강했다. 이전 연구들과 일치하는 결과다.

 

3일 뒤 피험자들은 두 번째 테스트를 받았다. 즉 기능성자기공명영상(fMRI) 장치 속에 들어가서 지난번 자신들이 말한 긍정적인 기억과 중성적인 기억들을 차례로 떠올렸다. 데이터를 분석하자 행복한 기억을 떠올릴 때 뇌의 선조체와 내측전전두엽피질이 더 활발히 작동했다. 이 영역들은 뇌에서 보상회로를 이루는 부분으로 다양한 차원의 보상에 관여한다. 즉 음식 같은 1차적 보상, 돈 같은 2차적 보상, 음악 감상 같은 추상적 보상 모두를 매개한다. 결국 행복했던 과거를 떠올리면 보상회로가 활성화돼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나 로또 3등에 당첨됐을 때처럼 현재의 기분까지 좋게 한다는 말이다.

 

 

2_과거 행복했던 일을 기억할 때는 평범한 일을 기억할 때에 비해 뇌의 보상회로인 선조체(왼쪽 뇌 이미지 원 안)와 내측전전두엽피질(오른쪽 뇌 이미지)이 더 활성화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뉴런 제공
2_과거 행복했던 일을 기억할 때는 평범한 일을 기억할 때에 비해 뇌의 보상회로인 선조체(왼쪽 뇌 이미지 원 안)와 내측전전두엽피질(오른쪽 뇌 이미지)이 더 활성화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 뉴런 제공

 

끝으로 연구자들은 행복했던 과거를 음미할 때 보상회로가 관여한다는 결과를 확인하는 행동실험을 했다. 즉 피험자들에게 돈을 덜 받고 행복했던 기억을 할 것인지 돈들 더 받고 중성적인 기억을 할 것인지 선택하게 한 것. 예상대로 받는 금액이 같으면 대부분(85%) 행복한 기억을 하겠다고 답했다. 금액의 차이를 두면서 실험을 한 결과 중성적인 기억을 할 때 2센트(약 20원)를 더 받는 조건에서 선택이 반반이었다.

 

테스트를 하며 이런 선택을 수십 차례 하더라도 수백 원에 불과한 돈이라 좋은 기억의 가치가 얼마 안 되는 것 같지만, 기억이란 외부에서 주어진 게 아니라 원하면 나중에 나 혼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걸 생각하면 미미한 차이라며 넘길 일은 아니다. 연구자들은 행복했던 일을 음미하는 게 기분을 좋게 할 뿐 아니라 정서조절에도 도움이 된다며 우울증 등 정서장애의 행동치료요법으로 도움이 될 거라고 제안했다.  

 

문득 꼭 행복했던 기억이 아니더라도 지나간 일들을 음미하는 게 분주한 일상에 지친 메마른 정서를 촉촉하게 적셔주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여전히 땅을 치고 후회할 일(그 여자 그때 잡았어야 했는데…)이라면 차라리 기억하지 않는 게 낫겠지만 아쉬운 정도(좋은 여자였는데. 지금 어디선가 행복하게 잘 살고 있겠지…)라면 말이다. 이제 그만 노트북을 덮고 커피 한 잔을 내려 음미하며 이선희 씨의 명곡 ‘추억의 책장을 넘기면’을 음미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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