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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행동의 진화] 언제까지 싸움만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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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행동의 진화] 언제까지 싸움만 할 것인가

2020.12.13 06:00
픽사베이 제공
픽사베이 제공

여러 대립이 변증법적 투쟁을 통해서 ‘역사적으로 발전’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역사적 발전’의 종착지는 사실 인류가 오래전에 살았던, 정확히 말하면 그렇게 살았다고 믿어지는, ‘원시 사회’였다. 또한, 이러한 발전은 무조건 일어날 ‘궁극적 결과’라고 했다. 그런데 이를 ‘어떻게든 달성’하기 위해 무장 혁명을 일으켜야 하며, 따라서 피의 독재는 불가피하다고 했다. 뭔가 이상하다.


궁극적 미래는 오래전의 과거, 억지로 쟁취해야 하는 필연적 미래, 평등을 위한 독재. 이러한 모순적인 이야기 구조는 19세기에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많은 이가 마르크스의 주장이 ‘참신’하다고 여겼지만, 사실 인간의 무의식적 기저 신념에 바탕을 둔 식상한 이야기를 리메이크한 것에 불과하다. 


미래에 나타날 천국은 과거에 잃었던 에덴동산이다. 신은 무조건 우리를 사랑하지만, 동시에 신의 사랑을 얻으려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한다. 인간은 신 앞에 평등하지만 동시에 신과 인간 사이에는 총 아홉 계층의 천사가 있다. 인간이 만날 수 있는 천사는 잘해야 9급 공무원, 아니 9급 천사인 엔젤이다. 인간 세상엔 더욱 복잡다단한 계급이 있다. 신과 천사, 그리고 일부 ‘가장 높은 인간’의 독재는, ‘모두가 평등한’ 천국에서도 여전히 지속할 것이다.


조지 오웰의 말에 의하면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다. 이런 모순은 상반된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인류의 독특한 인지 능력을 통해 꽃을 피웠다. 바로 언어다. 향기와 악취를 모두 가진 꽃이다. 하지만 언어 이전의 시대에도 모순적 믿음은 깊은 무의식 수준에서 작동하고 있었다. 수억 년 동안 우리의 조상은 생존과 번식을 좌우하는 몹시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싸움을 통한 평화, 평화를 통한 싸움을 선택하는 모순적 결정의 오랜 진화사다. 

 

전쟁은 평화인가

 

서론이 너무 거창했다. 


흔히 동물 종을 보면, 공격적인 녀석과 평화로운 녀석으로 간단히 나누어 생각한다. 사자나 호랑이는 싸움꾼, 사슴이나 나무늘보는 평화의 동물… 유치원생도 그렇게 나눈다. 사자나 나무늘보를 실제 본 적은 없으면서도 말이다. 


하지만 동물행동학자는 싸우느냐 싸우지 않느냐에 관한 행동을 이분법적으로 나누지 않는다. 사실 싸움과 비싸움은, 놀랍게도, 생태학적으로 같은 선상에 있는 개념이다. 조지 오웰은 자신의 소설,  《1984》에서 ‘전쟁은 평화(war is peace)’라는 당의 구호를 언급했는데, 진화생태학적으로 타당한 주장이다. 물론 그런 의미로 쓴 말은 아니지만. 


동물은 종종 효과적인 공격을 위해서 협력한다. 사실 협력적인 동물의 대명사로 불리는 개미는 엄청난 싸움꾼이다. 멕시코부터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 센트럴 밸리로 이어지는 광대한 영역에 아르헨티나개미 대군집이 자리하고 있다. 수퍼콜로니가 캘리포니아에만 네 개가 있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전쟁이 벌어진다. 매일 100만 마리가 수퍼콜로니 사이의 국경에서 ‘전사’한다. 


진화곤충학자 마크 모펫에 따르면, 과학자들은 원래 ‘아르헨티나개미가 항상 평화로운 축복 속에서 살아가는 행복한 한 가족’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2004년 서로 다른 지역에서 개미 표본을 채집했는데, 우연히 다른 수퍼콜로니, 즉 ‘국적’이 다른 개미였다. 한 곳에 섞어두자 격렬한 전투가 일어났다. 수퍼콜로니 내부의 평화를 유지하는 힘은, 어떤 면에서 다른 수퍼콜로니와의 전쟁 가능성에 기반한 것이었다. 전쟁은 평화다.


집단 내부에서도 마찬가지다. 개미는 끊임없이 ‘내부 단속’을 한다. 침입자는 즉시 오체 분열을 겪게 되는데, 종종 억울한 희생자도 생긴다. 조금이라도 정체성이 의심되는 개미는 즉시 다른 개체의 공격을 받는다. 뭐, 인간도 그렇다. 

 

끝없는 싸움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그런데 싸움은 반드시 피해를 준다. 죽거나 다친다. 분명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고 다니면, 제 명에 죽기 어려울 것이다. 싸움은 ‘싸움의 비용이 이득을 초과하지 않을 때’만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런데 종종 싸움은 지루하게 계속된다. ‘인제 그만 좀 싸우라’고 해도, 좀처럼 말을 듣지 않는다.
소모전(war of attrition), 즉 지속적인 싸움은 왜 일어날까? 양측이 모두 손해다. 70년째 휴전하면서 종종 잽을 날리는 남북한도 그렇고, 중동도 그렇다. 뭐, 여야도 계속 싸운다. 정치 집단의 싸움은 종종 ‘건설적 진통의 과정’으로 미화되지만… 그냥 미화다. 회사도 그렇다. 부서 간의 싸움이 ‘회사의 발전을 위한 치열한 고민의 과정’이 아니라는 것은 아마 직장인이라면 잘 알 것이다. 


진화생태학적으로 소모전은 세 가지 전제가 성립될 때 나타날 수 있다. 첫째 개체는 아주 오랫동안 공격성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공격성을 과시하다 곧 지쳐버리면 소모전은 불가능하다. 수명도 길어야 한다. 하루살이는 소모전을 통해 얻는 것이 없다. ‘끝까지’ 싸울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이러한 공격성을 ‘가짜로’ 보여줄 수 없어야 한다. 겉으로는 ‘불폭탄’을 날리겠다고 하지만, 막상 무기고가 텅 비어있다면 곧 발각된다. 위장할 수 없는, ‘진짜로 소모되는’ 소모전이어야 한다. 셋째 싸움 종결을 위한 단서가 애매해야 한다. 신체 크기의 차이, 세력권의 차이, 전투 능력의 차이가 분명하면 소모전은 일어나지 않는다. 서로 이길 수 있는지 혹은 질 것이 뻔한지 분명하지 않아야 소모전이 일어난다. 


똥파리 연구

 

행동생태학자는 종종 더러운 연구를 한다. 연구비를 빼돌렸다는 뜻이 아니다. 생물학자 제프 파커는 똥파리에 관해 현지 조사를 벌였다. 스카토의 라틴어 뜻이 ‘똥’이다. 분명 제프 파커는 연구 대상을 두고 다른 연구자와 별로 경쟁하지 않았을 것이다. 


똥파리는 큰 똥 위에서 신방을 차린다. 신선한 똥 덩어리가 땅에 떨어지면, 암컷 똥파리가 다가온다. 그러면 똥 덩어리당 약 1000마리의 수파리가 달려든다. 이중 암컷과 교미를 하려는 수컷은 다른 수컷에게 공격을 당한다. 인간 사회나 똥파리 사회나. 아무튼 그래서 새로운 수컷으로 교체된다. 이런 식으로 계속 싸움이 벌어진다. 결국 암컷은 여러 마리의 수컷과 교미하게 되는데, 그중 가장 마지막으로 교미한 수컷이 아빠가 될 확률이 높다. 그래서 똥파리는 비교적 긴 시간을 버티며 경쟁한다. 소모전이다.


눈치작전이 시작된다. 똥파리 입장에서는 암컷의 마지막 사랑이 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너무 오래 버티다 보면, 다른 암컷을 만날 가능성이 줄어든다. 그러나 너무 일찍 포기하고 떠나면 좀처럼 아빠가 되기 어려워진다. 대부분은 얼른 떠나지만, 일부는 오래 버티는 전략을 취한다.


시간이 지나면 똥 덩어리에 머무르는 수컷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든다. 즉 경쟁이 치열한 초기에는 얼른 떠나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는 편이 유리하다. 똥 덩어리, 그리고 똥 덩어리에 올라탄 암컷은 주변에도 많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버티는 전략도 괜찮다. 마지막 교미는 수정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높여준다. 그래서 시간이 오래 지나도 같은 똥 덩어리에서 버티는 수컷이 일부 존재한다. 소모전을 벌이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두 전략의 이득은 같다. 어떤 똥파리는 불과 20~30분을 머물렀고, 어떤 똥파리는 몇 시간 이상 똥 덩어리를 지키며 소모전을 벌였다. 그러나 이들의 짝짓기 성공률은 거의 같았다. 


소모전의 종결

 

칼럼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미안하다. 인간 사회에도 소모전이 많다. 끝없이 이어지는 갈등이다. 분명 원래 목적이 있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도대체 왜 싸우고 있는지 모르는 지경에 이른다. 하지만 분명 이득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소모전은 자원의 가치가 클수록, 그리고 다른 자원 공급 지역으로 이동하는 비용이 많이 들수록 오래간다. 


하지만 똥파리 모델처럼, 소모전을 취하는 개체의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감소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자원의 가치가 크면 싸움이 오래가지만, 그래도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결국 소모전이 종결된다.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오랜 싸움도 종결된다. 소모전이 일어나는 조건은 일정하지만, 영원히 지속하는 소모전은 없다. 그러니 싸움은 종결되고, 다른 자원을 두고 새로운 싸움이 시작되고, 또 종결되고… 무한한 반복이다. 수억 년 이상 지속한 자연 현상이다. 변증법적 역사 발전의 숙명적 과정이 아니다. 각각의 똥 덩어리에서 천 마리의 수컷 똥파리가 경쟁한다. 일부는 ‘패배’하여 얼른 떠나고, 일부는 몇 시간이고 ‘투쟁’하다가 번식에 성공할 것이다(사실 번식 적합도는 같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은 똥 덩어리마다 계속 반복될 것이다. 이를 똥파리 역사의 궁극적인 변증법적 발전 과정이라고 하면, 분명 똥파리로서는 감격하겠지만, 과도한 똥파리 중심적 해석이다. 


똥 위에서 몇 시간이고 버티면서 ‘투쟁’하는 똥파리에게는 무엇이 되었든 ‘숭고한 동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래야 소모전을 견디며 끝까지 이겨낼 수 있을지 모른다. 똥파리와 대화를 해본 적이 없어서 사실 잘 모르겠만 분명 인간의 경우에는 그렇다. 


하지만 어느 순간 소모전은 갑자기 종결된다. 수렴하는 등비급수의 당연한 결과다. 인류의 깊은 심성 속에서 오랜 세월을 통해 빚어진 신념, 평화를 위한 고결한 동기와 위대한 이상이 부르는 기나긴 투쟁과 잔혹한 파괴. 이러한 모순적이며 역설적인 환상은, 그러나 어느 순간 느닷없이 끝나버린다. 영원한 혁명은 없다. 늙은 혁명가는 외롭다. 주변의 동지는 어디론가 다른 곳으로 사라졌고, 아무도 없는 똥 덩어리에서 마지막 파르티잔이 쓸쓸하게 최후를 맞을 것이다. 오늘도 수많은 똥 덩어리에서 벌어지는 자연 현상이며, 인류 역사에서도 계속 반복된 이야기다. 

 

※필자소개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인류학 및 진화의학을 강의하며, 정신장애의 진화적 원인을 연구하고 있다. 동아사이언스에 '내 마음은 왜 이럴까' '인류와 질병'을 연재했다.  번역서로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진화와 인간행동》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행동과학》,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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