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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행동의 진화] 애국심의 진화, 국뽕의 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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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행동의 진화] 애국심의 진화, 국뽕의 진화

2021.01.03 06:00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애국심은 좀처럼 부인하기 어려운 도덕적 가치다. ‘나는 애국하지 않겠다’라고 하면, 곧 매국노로 취급받는다. 애국의 방법이나 방향에 대한 이견은 있더라도, 애국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어느 나라에서나 대단히 위험한 일이다. 집단의 가치를 존중하도록 강제하는 의례나 규율은 어느 사회에나 있지만, 국가에 대한 애국심에 비견할만한 것은 없다. 많은 사람이 개인의 자유마저도 애국을 위해서라면 제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국가라는 제도는 생겨난 지 수천 년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동안 수백 년 이상 지속한 국가도 드물다. 강력한 심리적 기전이 진화하기에는 부족한 시간이다. 하지만 애국심에 대한 인간의 열정은 보편적이고, 강력하고, 지속적이다. 단지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아 생기는 것 같지 않다. 애국심은 도대체 어떻게 진화한 것일까? 

 

국가는 이래야 한다는 믿음

 

사회라는 개념이 늘 불분명하다. 사회(society)라는 말은 라틴어의 ‘societa’에서 유래한 말이다. 유대 관계를 가지는 집단이나 동맹을 뜻하는 말이다. 보통 정치나 문화, 제도 등에서 공통의 관심이나 믿음, 이해 등을 가진 여러 사람의 집단을 말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사회라는 개념과 좀 다르다.


사회라는 번역어는 더 이상하다. 일본에서 유래했는데, 사(社)와 회(會)를 합친 말이다. 두 글자 모두 모인다는 뜻이다. 회사도 똑같은 한자를 쓰는데, 순서만 반대다. 처음에는 작은 동료 집단을 의미하는 말이었는데, 점점 의미가 바뀌게 되었다. 대학 시절, 대학생들의 사회(Society of University Students)라는 클럽 활동을 했다. 5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클럽이라 그런 고풍스러운 이름을 가지고 있었지만, 당시에도 어색했다. 이제 작은 임의의 집단에는 사회라는 말을 잘 쓰지 않기 때문이다. ‘죽은 시인의 사회’도 마찬가지로 낯설다.

 

일반적으로 사회라고 하면, 대개 국가를 먼저 떠올린다. 다른 집단과 분명하게 구분되며, 집단의 구성원보다 훨씬 오래 유지되고, 자식을 낳으면 자동으로 구성원 자격을 얻으며, 다른 국가의 구성원은 쉽게 자격을 얻지 못한다. 그리고 국가라는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돈도 걷고, 노동도 걷고, 가끔은 목숨도 걷는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기준. 구성원 대다수는 아주 자발적으로 자신의 사회, 즉 국가에 대해서 강한 소속감을 느낀다. 


정말 알쏭달쏭한 기준이다. 수백만 명에서 수억 명이 넘는 국가라는 사회. 그러나 구성원 대부분은 서로 만나본 일도 없다.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것도 아니며, 서로 긴밀하게 협력하는 것도 아니다. 여러분이 평생 만나본 ‘한국인’은 몇 명이나 되는가? 그중에서 통성명을 한 사람은 얼마나 될까? 편하게 전화할 정도로 친밀한 사람은? 차용증 없이 돈을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은 몇 명인가? 급속도로 그 숫자가 줄어들 것이다. 단 10만 원이라도 아무 조건 없이 빌려줄 수 있는 동료의 숫자는 정말 손으로 헤아린다. 

 

그런데도 사회는 이래야 한다, 국가는 저래야 한다. 온통 그런 주장이 넘쳐난다. 도대체 언제 본 사이라고? 요리를 하나 시도해도 실패할 가능성이 제법 높은데, 사회에 대해서는 정말 아무렇게나 참견한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우격다짐으로 먹으라면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레시피를 들이대는 것이다. 인간 사회엔 늘 부족한 것이 많았지만, ‘사회가 이렇게 바뀌어야’를 주장하는 사람이 부족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가까운 친구나 동료에게 이런저런 참견을 하는 타입인가? 아닐 것이다. 사실 가족의 인생도 좀처럼 어쩌지 못한다. 아니, 자신의 복부 비만조차 맘대로 안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다들 세상에 대해서는 함부로 이래라저래라하다니… 참 이상한 일이다. 

 

작은 차이에 의한 자아도취

 

 

게티이미지뱅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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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론에 의하면 사회는 개별적인 행위자의 계약에 의한 상상의 공동체다. 이러한 주장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 상태의 고통스러운 투쟁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특정 집단이나 개인에게 힘을 몰아주고, 대신 평화와 안정을 찾는다. 일종의 거래다. 따라서 개인은 이러한 계약 조건을 지켜야 하지만, 이득을 최대화하기 위해서 계약을 갱신하거나 수정할 권리도 가진다.

 

이러한 주장은 논리적으로 보이지만, 진화적으로는 성립하기 어렵다. 집단의 총의를 어떻게 판단할 것이며, 누가 실제 계약을 맺고 있으며, 계약 조건의 결과는 어떻게 평가한단 말인가? 설령 ‘미지의 힘’에 의해서 이러한 과정이 일어난다고 하더라고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더 좋은 조건을 제안하는 사회나 국가와 새로 계약을 체결하지 않는가? 

 

프로이트는 1929년,  《문명 속의 불만》이라는 책에서 문명과 본능을 대립적인 구도로 설명했다. 문명은 본능을 억제하고, 이를 통해서 공유의 재산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사회에 대한 죄책감이 생겨나는데, 문명이 발달할수록 죄책감은 점점 더 강해진다. 심리적 현상이다. 오로지 계약에 의해 사회가 구성된다면, 계약 위반에 따른 벌칙은 있을지 몰라도 깊은 죄책감까지 생길 이유는 없다. 또한 사회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사람도 좀처럼 생길 수 없다. 목숨과 맞바꿀 수 있는 계약 조건이 과연 무엇일까? 

 

문제는 또 있다. 왜 우리는 자기 집단을 숭상하고, 다른 집단을 왜 미워하는가? 삼성화재와 자동차보험을 계약했다고 해서, 삼성화재와 사랑에 빠지면서 현대해상을 증오하는 사람이 있는가? 조지 버나드 쇼는 이렇게 말했다. 


“애국심이란 것은, 근본적으로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국가 중 특정 국가가 특별하다는 신념이다. 자기가 거기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프로이트는 이를 ‘작은 차이에 의한 자아도취(Narcissism of small differences)’라고 불렀다. 유럽의 여러 국가는 다닥다닥 붙어있으면서 서로 비슷비슷한데, 사람들은 사소한 차이에 도취하여 자신의 국가가 최고라고 믿었다. 이러한 경향은 처음에는 해롭지 않은 자기만족으로 그치지만, 종종 아주 심해진다. 작은 차이를 침소봉대하거나 심지어 없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이내 다른 사회나 국가를 비난하고 헐뜯는다. 심지어 ‘그들을’ 없어져야 할 열등한 짐승으로 깎아내리는데 이른다.

 

문명이 부른 과도한 초자아는 결국 신경증을 유발한다. 인간의 자아가 문명적 초자아의 욕구에 모두 따를 수 있고, 이드에 대해 제한 없는 통제력을 가진다고 믿는 것이다. 너무 어려운가? 다시 말해서 시민은 국가를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하지만 불가능하다. 국가는 애국심을 강조하며 시민을 억압할 수 있지만, 곧 생물학적 한계에 도달하게 된다. 국가의 통제를 선뜻 받아들이던 '애국자'도 점점 삶이 고달파지는 역설적 현실을 깨닫는다. 불만이 쌓일 수 밖에 없다. 억압된 불만은  집단적 공격성으로 이어진다. 전쟁이다. 프로이트가 《문명 속의 불만》을 출간한 지 10년 후, 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건강한 애국심은 있는가? 

 

일본 여행을 다녀오면 매국노로 취급하던 적이 있었다. 불과 1년 전의 일이다. 코로나가 확산하던 올해 초, 중국인을 추방하라는 여론이 거셌다. 특정 브랜드의 옷을 입으면 신상 테러를 가하기도 했고, 외제 차를 타고 다니면 역적으로 몰던 때도 있었다. 지금은 코로나 확진자 숫자의 작은 차이에 도취해서, 마스크 착용 위반자를 비난한다. 나라를 빛낼 K방역을 훼손한다는 것이다. 아니, 도대체 무엇을 위한 방역인가? 


사실 양담배를 길거리에서 화형에 처하던 때도, 명품 외제 가방에 붉은 페인트를 퍼붓던 때도 그리 오랜 옛날 일이 아니다. 분명 건강한 애국심은 아니다.

 

외집단 혐오는 종종 내집단 구성원 중 ‘반역자 찾기’ 게임으로 나타난다. 작은 차이에 취해서 국가와 자신을 일치시킨다. 자존감이 부족한 사람일수록, 자기 정체성을 몽땅 국가에 투사한다. 국가를 욕되게 하는 일은 자신을 욕되게 하는 일이다. 국가의 위대성을 입증하는 일은, 자신의 위대성을 입증하는 일이다. 따라서 반역자를 찾아 공격하는 일은 애국심을 입증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죄책감 따위는 없다. 초자아에 순응하는 일이므로 죄책감이 아니라 사명감이 더 앞선다. 옳은 일을 하는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비극이 시작된다. 애국심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수많은 역사적 비극을 들춰보면, 과연 애국이라는 가치가 옳은 가치인지 의문이 들 것이다.

 

애국이라는 말을 건강한 애국심과 편협한 국수주의로 나눌 수 있을까? 다양성을 존중하고,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며, 권리의 제한은 최소한으로 줄이고, 국가의 명예라는 허상이 아니라 구성원의 이익이라는 실질에 봉사하는 애국심이다. 그리고 국가의 정체성을 미화하고, 구성원보다는 집단의 이익을 강조하고, 국가의 우월함을 과시하기 위해 구성원의 희생을 강요하는 국수주의다. 뭔가 결과론적 이분법 같지만, 더 만족스러운 구분 방법을 모르겠다.

 

동물의 사회는 무시무시한 본능으로 유지되는 원시의 무리에 더 가깝다.  서로 다른 개미 집단이 서로 엉기면 대규모 살육전이 벌어진다. 다른 무리 영토에 잘못 들어온 침팬지는 종종 참혹하게 죽는다. 인간 사회도 그렇다. 수단 북부 제벨 사하바에는 61명의 남녀가 죽은 살육의 증거가 발견되었다. 20개가 넘는 무기의 파편과 잘린 뼈가 나왔고, 45% 이상의 희생자가 여성과 아이였다. 13000년 전, 지금까지 발견된 최초의 집단 살육이었다. 애국심의 원형은 아마 신석기가 시작될 무렵에는 확실해졌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인종에 따른 유전자의 차이가 크지 않듯이, 민족에 따른 민족성의 차이도 그리 크지 않다. 자민족이나 자기 국가의 ‘작은 차이를 강조하는 자아도취적 주장’이 어디서나 넘쳐나지만, 피부색으로 인종의 우열을 구분하자던 인종주의만큼이나 어리석은 일이다. 사실 건강한 애국심과 병든 국수주의를 나누는 분명한 기준은 없다. 그러나 ‘우리가 남보다 우월하다’ 혹은 ‘남이 우리보다 못하다’는 주장을 들을 때, 기분이 고양된다면 분명 자신을 돌아봐야 할 때다. 비슷한 사람끼리 다른 나라를 욕하고 비난할 때, 뿌듯한 느낌, 하나되는 느낌을 가진다면 심각한 상태다. 

 

※필자소개

박한선.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신경인류학자. 서울대 인류학과에서 진화인류학 및 진화의학을 강의하며, 정신장애의 진화적 원인을 연구하고 있다. 동아사이언스에 '내 마음은 왜 이럴까' '인류와 질병'을 연재했다.  번역서로 《행복의 역습》, 《여성의 진화》, 《진화와 인간행동》를 옮겼고, 《재난과 정신건강》, 《정신과 사용설명서》, 《내가 우울한 건 다 오스트랄로피테쿠스 때문이야》, 《마음으로부터 일곱 발자국》, 《행동과학》, 《포스트 코로나 사회》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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